라자 하리샨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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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자 하리샨드라는 1913년 개봉된 인도의 무성 영화로, 다다사헤브 팔케가 감독했다. 하리샨드라 왕의 정직함을 시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팔케는 이 영화를 통해 인도 영화 산업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영화는 인도 최초의 장편 영화로 여겨지지만, 다다사헤브 토르네의 "쉬리 푼달릭"과의 선구자 논쟁이 있다. 현재는 부분적으로 유실된 상태로, 인도 국립 영화 보관소에 일부 필름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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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 하리샨드라 - [영화]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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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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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Raja Harishchandra |
영어 제목 | King Harishchandra |
번역 제목 | 하리쉬찬드라 왕 |
장르 | 사이렌트 영화 |
감독 | 던디라이 고빈드 팔케 |
각본 | 던디라이 고빈드 팔케 |
제작 | 던디라이 고빈드 팔케 |
촬영 | Trymbak B. Telang |
편집 | Dadasaheb Phalke |
제작사 | 팔케 필름즈 컴퍼니 |
출연 | 다타트라야 다브케 안나 살룬케 발찬드라 팔케 가자난 사네 |
개봉일 | 1913년 4월 21일 |
상영 시간 | 40분 |
제작 국가 | 인도 |
언어 | 무성 |
2. 줄거리
하리샨드라 왕은 왕비 타라마티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 로히타슈바에게 활쏘는 법을 가르친다. 신하들의 청으로 사냥을 나선 하리샨드라는 여성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게 된다. 소리를 따라간 곳에서 비슈바미트라 성자가 세 가지 힘(트리구나 샤크티)을 얻기 위해 야지나(제사 의식)를 수행하는 것을 발견하고, 의도치 않게 이를 방해하게 된다.[1][2]
크게 분노한 비슈바미트라를 달래기 위해 하리샨드라는 자신의 왕국을 바치겠다고 제안한다. 왕궁으로 돌아와 타라마티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한 뒤, 비슈바미트라는 왕국을 넘겨받고 하리샨드라와 그의 가족을 추방하며 추가로 다크시나(보시)를 요구한다.
망명 생활 중 아들 로히타슈바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하리샨드라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타라마티를 돔 왕에게 보내 무료 화장을 부탁하게 한다. 그러나 타라마티는 돔 왕에게 가는 도중, 비슈바미트라의 계략으로 카시의 왕자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타라마티는 하리샨드라의 손에 직접 참수당할 운명에 처한다.
하리샨드라가 슬픔을 누르고 왕비의 처형을 집행하기 위해 칼을 들어 올린 바로 그 순간, 시바 신이 나타난다. 비슈바미트라는 이 모든 것이 하리샨드라의 정직함과 진실됨을 시험하기 위한 시련이었음을 밝힌다. 시련을 통과한 하리샨드라에게 왕관을 돌려주고 죽었던 아들 로히타슈바도 다시 살려준다.[49]
2. 1. 등장인물
등장인물 | 배우 | 설명 |
---|---|---|
하리샨드라 | 다타트라야 다모다르 다브케 | 진실과 정의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왕. 성자 비슈바미트라의 시험을 받는다.[49] |
타라마티 | 안나 살룬케 | 하리샨드라 왕의 충실한 아내.[49] |
로히타슈바 | 발찬드라 팔케 | 하리샨드라 왕과 타라마티 왕비의 아들.[49] |
비슈바미트라 | 가자난 바수데브 사네 | 하리샨드라 왕의 청렴함을 시험하는 강력한 성자.[49] |
그 외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다음과 같다.
- 다타트레야 크시르사가르
- 다타트레야 텔랑
- 간팟 G. 신데
- 비슈누 하리 운드카르
- 나트 T. 텔랑
3. 제작
《라자 하리샨드라》는 다다사헤브 팔케가 1911년 앨리스 가이-블라셰의 영화 '예수의 생애'를 본 후 인도 신화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하면서 시작되었다.[4] 그는 런던에서 영화 제작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1912년 팔케 필름 컴퍼니를 설립했다.[4][5] 초기 자금 확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5][6], 팔케는 힌두 신화 속 하리샨드라 이야기를 각본으로 직접 썼다.[6][53] 배우 캐스팅 과정은 순탄치 않았는데, 특히 여성 역할을 맡을 배우를 찾기 어려워 남성 배우인 안나 살룬케가 여주인공 타라마티 역을 맡았고, 아들 발찬드라 팔케가 아역 로히타슈바 역을 맡았다.[8][9][10][11] 촬영은 1912년 말부터 뭄바이의 스튜디오와 반가니 등 야외에서 약 7개월간 진행되었으며, 트릭 사진술과 같은 당시의 기술이 활용되었다. 이 영화는 인도 최초의 장편 영화로 기록된다.
3. 1. 기획
1911년 4월 14일, 다다사헤브 팔케는 아들 발찬드라와 함께 기르가온의 아메리카 인디아 픽처 팰리스에서 '놀라운 동물들'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4] 발찬드라는 화면 속 동물에 놀라 어머니 사라스와티바이에게 이야기했지만, 가족들은 믿지 않았다. 다음 날 팔케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다시 극장을 찾았다. 그날은 부활절이었고, 극장에서는 프랑스 감독 앨리스 가이-블라셰의 1906년 작 영화 '예수의 생애'를 상영하고 있었다.[4] 팔케는 화면 속 예수를 보며 힌두교의 신인 라마와 크리슈나를 떠올렸고, 이를 계기로 영화 제작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4] 그는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내 눈앞에 ''예수의 생애''가 빠르게 펼쳐지는 동안, 나는 정신적으로 신들, 시리 크리슈나, 시리 라마찬드라, 그들의 고쿨과 그들의 아요디아를 시각화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마법에 사로잡혔다. 나는 다른 표를 사서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내 상상이 화면에서 형태를 갖추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우리 인도인들이 과연 인도 이미지를 화면에서 볼 수 있을까?"[4]
영화 제작 기술을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떠난 팔케는 2주간의 학습을 마치고 돌아와 1912년 4월 1일에 팔케 필름 컴퍼니를 설립했다.[4] 런던 체류 중 주문했던 윌리엄슨 카메라와 코닥 원시 필름, 천공기는 1912년 5월 뭄바이(당시 봄베이)에 도착했다.[5] 팔케는 현상실을 마련하고 가족들에게 필름 천공과 현상 기술을 가르쳤다.[5]
팔케는 자신의 영화 제작 구상에 확신이 있었지만, 자금을 지원해 줄 투자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그는 자신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한 짧은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화분에 콩 씨앗을 심고 카메라를 설치한 뒤, 한 달 넘게 매일 한 프레임씩 촬영하여 씨앗이 싹트고 자라 덩굴이 되는 과정을 약 1분 길이의 영상으로 담았다. 팔케는 이 단편 영화에 '안쿠라치 와드'(콩 식물의 성장)라는 제목을 붙여 야스와트라오 나드카르니, 나라얀라오 데바레 등 잠재적 투자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기술에 감명받은 이들은 팔케에게 자금 대출을 제안했고, 이를 바탕으로 팔케는 장편 영화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5][6]
3. 2. 각본
팔케는 처음에 자신의 마라티어 잡지 《수바르나말라》에 게재했던 이야기 "수라바이치 카하니"("수라의 이야기")를 영화화할 생각이었다. 이 이야기는 알코올 중독의 폐해를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봄베이에서 상영된 여러 미국 영화들을 보고 관객들이 미스터리 영화와 로맨스 요소를 선호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의 가족들은 이야기가 중산층과 여성 관객에게 어필하고 인도 문화를 강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이에 팔케는 힌두 신화 속 여러 이야기를 검토했고, 가족들과 함께 크리슈나, 사비트리와 사티야반, 그리고 하리샨드라의 이야기를 최종 후보로 꼽았다. 당시 하리샨드라의 이야기는 마라티 극장과 우르두 극장에서 연극으로 상연되며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더불어 팔케 자신도 영화 제작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내의 망갈라 수트라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재산을 처분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이웃들로부터 그의 정직함과 희생을 빗대어 "하리샨드라"라고 불리기도 했다.[6][53]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팔케는 최종적으로 하리샨드라의 이야기를 선택했고, 직접 영화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3. 3. 캐스팅

팔케는 영화 제작에 필요한 배우와 스태프를 구하기 위해 ''인두프라카쉬'' 등 여러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게재했다.
> 배우, 목수, 세탁부, 이발사, 화가를 구합니다. 주정뱅이, 빈둥거리는 자, 혹은 못생긴 사람은 배우 지원을 삼가십시오. 잘생기고 신체 결함이 없는 사람이 벙어리라면 괜찮습니다.[7] 예술가는 훌륭한 배우여야 합니다. 부도덕한 생활을 하거나 꼴사나운 외모나 매너를 가진 사람은 방문할 필요가 없습니다.[8]
광고는 좋은 반응을 얻어 많은 지원자들이 오디션에 참여했으나, 팔케는 지원자들의 실력에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광고 게재를 중단하고 극단을 통해 배우를 직접 섭외하기로 결정했다.[7]
파두랑 가드하다르 사네와 가자난 바수데브 사네는 팔케 영화사에 합류한 초기 배우들이었다.[8] 파두랑은 나타칼라 극단에서 여성 역할을 맡은 경험이 있었고, 가자난은 우르두어 연극에서 활동했다.[7] 두 배우 모두 월 40INR의 급여를 받고 입사했다. 이후 가자난 사네의 소개로 다타트라야 다모다르 다브케(Dattatraya Damodar Dabke)가 합류했는데, 팔케는 그의 체격과 인상에 감명받아 주인공 하리샨드라 역을 제안했다.[8]
당시 인도 사회 분위기상 영화에 출연하려는 여성을 찾기 매우 어려웠다. 타라마티 역을 위해 광고를 보고 찾아온 네 명의 매춘부가 오디션을 봤지만, 팔케는 외모가 만족스럽지 않다며 거절하고 광고 문구를 "외모가 좋은 여성만 면접에 응시하십시오"라고 수정했다.[8] 이후 두 명의 매춘부가 더 오디션을 봤으나 이틀 만에 그만두었고, 젊은 여성(애인)이 오디션을 통과했지만 리허설 4일 만에 그녀의 주인이 나타나 촬영을 반대하며 데려가 버렸다.[8]
여성 배우를 찾지 못해 절망한 팔케는 봄베이 그랜트 로드의 카마티푸라 사창가까지 찾아갔으나, 높은 급여를 요구하거나 결혼을 조건으로 내거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9] 그러던 어느 날, 그랜트 로드의 한 식당에서 차를 마시던 팔케는[9] 가냘픈 외모와 손을 가진 여성스러운 젊은 남성, 크리슈나 하리 일명 안나 살룽케를 우연히 발견했다.[10] 살룽케는 식당에서 요리사 또는 웨이터로 일하며 월 10INR를 받고 있었는데,[10][7] 팔케가 월 15INR를 제안하자 영화 출연에 동의했다.[8] 결국 살룽케가 여주인공 타라마티 역을 맡게 되었다. 살룽케는 이후 팔케의 1917년 영화 ''사티아바디 라자 하리샨드라''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았으며, 같은 해 영화 ''란카 다한''에서는 남성 주인공 라마와 그의 아내 시타 역을 동시에 연기하며 인도 영화 최초로 1인 2역을 소화한 배우가 되었다.[9]
하리샨드라와 타라마티의 아들 로히타슈바 역 캐스팅 역시 순탄치 않았다. 많은 소년들이 오디션을 봤지만, 극 중 숲에서 살다가 죽어야 하는 역할이라는 점 때문에 부모들이 자녀의 출연을 꺼렸다. 결국 팔케는 자신의 큰아들 발찬드라 팔케(Bhalchandra Phalke)를 이 역에 캐스팅했고, 발찬드라는 인도 영화 최초의 아역 배우가 되었다.[8][11]
배역 | 배우 |
---|---|
하리샨드라 | 다타트라야 다모다르 다브케 |
타라 마티 (하리샨드라의 아내) | 안나 살룬케 |
로히타슈바 (하리샨드라의 아들) | 발찬드라 팔케 |
비슈바미트라 | 가자난 바수데브 사네 |
이 외에도 다타트레야 크시르사가르, 다타트레야 텔랑, 간팟 G. 신데, 비슈누 하리 운드카르, 나트 T. 텔랑 등이 영화에 출연했다.[11]
팔케는 당시 "공장"으로 불리던 자신의 영화 스튜디오에 약 40명의 스태프를 고용했다.[9][12] 영화 작업이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팔케는 스태프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하리쉬찬드라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한다"고 말하도록 조언했다.[10] 배우들 중 극장 경험이 있는 사람은 소수였고 대부분 연기 경험이 전무했다. 팔케는 배우들과 여러 차례 리허설을 진행했으며, 때로는 직접 사리를 입고 연기를 시연하기도 했다.[6] 여성 역할을 맡은 남성 배우들은 배역 몰입을 위해 스튜디오에서 사리를 입고 여성들의 집안일(쌀 체질하기, 밀가루 만들기 등)을 돕도록 했다.[12] 또한 리허설 스튜디오 벽에는 다양한 표정을 담은 영어 간행물의 사진들을 걸어두고, 배우들이 이를 보며 표정 훈련을 하도록 했다.[13]
3. 4. 촬영

1912년 몬순 시기가 지난 후 영화 제작 디자인이 시작되었다. 다다르에 있는 팔케의 방갈로에 세트를 세웠으며, 야외 촬영은 뭄바이 외곽 마을인 반가니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여성 역할을 맡은 안나 살룬케를 포함한 일부 남성 배우들은 콧수염 깎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수행되는 힌두교 의식(Antyesti)의 일부였기 때문이다.[6][14][53][61] 팔케는 배우들과 그들의 아버지들을 설득하여 콧수염을 깎게 한 뒤, 촬영팀과 함께 반가니로 떠났다.[40]
먼저 도착한 촬영팀은 마을 사원에 머물며 팔케가 도착할 때까지 리허설을 진행했다. 마을 사람들은 의상을 입고 칼, 방패, 창을 휘두르며 장면을 연습하는 배우들을 보고 겁에 질렸다. 그들은 촌장에게 도적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알렸고, 촌장은 즉시 이를 경찰청장에게 보고했다. 촬영팀은 그들에게 영화 제작에 대해 설명했지만, 경찰청장은 믿지 않고 모두를 체포했다. 뒤늦게 마을에 도착한 팔케는 즉시 촌장과 경찰청장을 만나 장비를 보여주며 영화와 촬영에 대해 다시 설명했다. 그는 카메라에 필름을 넣지 않은 채 촬영팀에게 영화의 한 장면을 연기하게 하고 촬영하는 시늉을 했다. 그 장면을 본 후, 경찰청장은 팔케의 새로운 시도를 이해하고 모두를 석방했다.
촬영 중 로히타슈바 역의 아역 배우 발찬드라는 다른 아이들과 놀다가 돌에 넘어져 머리를 다치고 의식을 잃었다. 팔케는 응급 처치 키트로 그를 치료했지만, 그는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여러 촬영팀 구성원들은 발찬드라를 추가 치료를 위해 뭄바이로 데려가고 그가 완전히 회복되면 촬영을 재개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촬영될 장면은 발찬드라의 캐릭터인 로히타슈바가 장례식 화장터에서 죽은 채로 나오는 것이었고, 발찬드라의 회복을 기다리면 제작이 지연되고 비용이 발생할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를 피하기 위해 팔케는 의식이 없는 발찬드라를 데리고 그대로 그 장면을 촬영하기로 결정했다.[6][53]
하리샨드라 전설에 따라 왕이 타라마티, 로히타슈바와 함께 카시를 방문하는 장면이 필요했다.[15][62] 그러나 팔케가 카시로 가서 그곳에서 장면을 촬영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촬영팀을 트림바케슈와르로 보내 약 한 달 동안 캠프를 치고 필요한 장면을 촬영했다. 팔케는 낮 동안 촬영된 장면들을 위해 밤에 필름을 현상하곤 했다. 그는 원하는 품질이 아니면 다음 날 그 장면을 다시 촬영했다. 영화는 총 6개월 27일 만에 완성되었고, 필름 길이는 약 1127.76m(약 4릴)에 달했다.
팔케는 현자가 야즈나-쿤드 연기 뒤에서 신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면 등을 촬영하기 위해 트릭 사진술을 사용했다. 당시 사용된 필름 네거티브는 스펙트럼 민감도가 제한적이었고 특히 스펙트럼의 붉은색 밴드에 대한 민감도가 낮았기 때문에, 세트, 의상, 배우들의 분장에서 붉은색 계열을 피해야 했다. 19세기 초 연극에서는 본편 시작 전에 쇼의 출연자를 소개하는 사회자나 해설자가 있는 도입 에피소드가 일반적이었다.[16][17][63][64] 촬영팀 구성원들은 영화에도 팔케와 그의 아내가 각각 수트라다르(해설자)와 나티(여성 해설자) 역할을 하는 유사한 소개 에피소드가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팔케는 그 아이디어에 동의했지만, 아내 사라스와티바이를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결국 파두랑 가다다르 사네가 나티 역할을 맡았다.[18][65]
4. 개봉 및 평가
다다사헤브 팔케는 인도 최초의 장편 영화인 《라자 하리샨드라》를 제작했지만, 상영관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1913년 4월 21일 뭄바이의 올림피아 극장에서 시사회를 열었고, 언론과 지식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에 힘입어 같은 해 5월 3일 코로네이션 시네마토그래프 앤 버라이어티 홀에서 정식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개봉 초기에는 매진 행렬을 이어갔으며, 상영 기간이 연장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뭄바이에서의 성공 이후 인도 전역에서 상영 요청이 쇄도했으나, 당시에는 영화 배급 시스템이 없어 팔케가 직접 영사 장비를 가지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상영해야 했다. 특히 수라트에서는 독특한 홍보 전략을 통해 흥행 부진을 극복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인도 최초의 장편 영화로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인도 영화 산업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평가들은 팔케의 연출력, 당시 기술 수준을 고려한 특수 효과, 인도 전통 예술 형식의 차용 등을 높이 평가했다. 《라자 하리샨드라》의 성공과 팔케의 업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영화 제작 과정은 2009년 마라티 영화 ''하리쉬찬드라치 팩토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4. 1. 개봉
팔케는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 때문에 상영할 극장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엄선된 관객에게 영화를 보여주기로 결정하고 1913년 4월 21일 오후 9시에 뭄바이 올림피아 극장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초대받은 사람에는 의사이자 사회 운동가인 바할찬드라 바타브데카르 경,[19][66] 학자 R. G. 반다르카르,[20][67] 소액 소송 법원의 도날드 판사,[21][68] 신문 편집자 및 대표, 뭄바이의 일부 지식인 및 저명인사 등이 포함되었다.[22][69]
시사회 직전 팔케의 어린 딸 만다키니가 폐렴에 걸렸고, 그의 형 시브람판트는 시사회를 연기하라고 조언했으나, 이미 초대가 발송되었고 극장은 4월 21일에만 이용 가능했기에 팔케는 예정대로 진행했다.[22][69]
바타브데카르는 팔케의 "용기"와 "참신함"을 인정하며 시사회를 소개했고,[66] 도날드 판사는 이 영화가 유럽인들이 힌두 신화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68] ''케사리''의 아난트 나라얀 코울게카르는 리뷰에서 "팔케는 그의 솜씨를 세상에 훌륭하게 알렸다"고 언급했으며, ''타임스 오브 인디아''는 영화 장면이 "그저 놀랍다"며 "[나는] 이 인도적 작품을 보는 것이 정말 즐겁다"고 호평했다. 이러한 호평 덕분에 기르가온에 위치한 코로네이션 시네마토그래프 앤 버라이어티 홀의 매니저 나나사헤브 치트레는 영화 상영을 제안했다.
영화는 1913년 5월 3일, 코로네이션 시네마토그래프 앤 버라이어티 홀에서 정식 개봉했다. 상영 프로그램에는 아이린 델마의 댄스, 맥클레멘츠의 코믹 연기, 알렉산드로프의 발 저글링, 팁-탑 코믹 공연 등이 포함되었고, 이후 영화가 상영되었다. 총 상영 시간은 1시간 30분이었으며, 하루에 오후 6시, 8시, 10시, 11시 45분, 총 4회 상영되었다. ''The Bombay Chronicle''에 실린 광고에 따르면 티켓 요금은 평소의 두 배였다.
영화는 개봉 첫 주 동안 매진 행렬을 이어갔고, 상영 기간이 12일 더 연장되었다. 5월 17일에는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특별 상영이 반값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5월 18일이 마지막 상영일로 광고되었으나, 대중의 요청으로 상영은 계속되어 5월 25일까지 총 23일간 상영되었다. 6월 28일에는 알렉산드라 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1913년 5월 5일자 ''The Bombay Chronicle''은 "이 훌륭한 드라마는 배우들의 훌륭한 연출로 표현되었으며" 팔케가 영화 장면을 연출하는 "아름다움과 독창성"을 칭찬했다.
뭄바이에서의 성공 소식은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가 상영 요청이 쇄도했다. 당시 영화 배급사가 없었기 때문에 팔케는 직접 영화 필름, 영사기, 기사 및 조수들과 함께 여러 지역을 순회해야 했다. 수라트의 나와비 극장에서 일주일간 상영할 때는 극장주와 수익을 50%씩 나누는 임시 계약을 맺었다. 광고에도 불구하고 첫 상영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수입에 실망한 극장주가 상영 취소, 상영 시간 연장, 또는 티켓 가격 인하를 제안했지만 팔케는 이를 거절했다. 대신 그는 구자라트어로 "약 1.91cm 폭, 약 3.22km 길이의 57,000장의 사진"을 단 1 안나에 볼 수 있다고 광고하고, 배우들에게 마을 교차로에서 영화의 일부 장면을 연기하도록 했다. 이 홍보 전략은 효과를 거두어 수입이 ₹300으로 증가했다.[23] 이후 영화는 푸네, 콜롬보, 런던, 랑군 등에서도 마라티어와 힌디어 자막과 함께 상영되었다.[18]
4. 2. 평가 및 영향
영화 역사가 피로즈 랑군왈라는 이 영화가 "넓은 인상을 주었고 다양한 장소의 많은 관객에게 어필했다"고 평가하며, 흥행 성공이 "수용의 도장을 찍었고 인도 영화 산업의 기반을 다졌다"고 분석했다.[23] 이는 인도 최초의 장편 영화로서 다다사헤브 팔케가 '인도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봄베이에서의 성공 이후 영화 상영 요청이 인도 전역에서 쇄도했다. 당시에는 영화 배급 시스템이 없어 팔케는 직접 영사기, 필름 등을 가지고 여러 지역을 순회해야 했다. 수라트에서는 초기 흥행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구자라트어로 "폭 3/4인치, 길이 2마일의 사진 57,000장을 단 1 인도 안나로 볼 수 있다"고 광고하고, 배우들이 거리에서 직접 장면을 시연하는 등 적극적인 홍보를 펼쳐 큰 성공을 거두었다.[70] 이후 영화는 푸네, 콜롬보, 런던, 랑군 등 해외에서도 마라티어와 힌디어 자막과 함께 상영되어 인도 문화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52][48][18]
영화 평론가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영화를 분석했다. 감독이자 촬영 감독인 고빈드 니할라니는 야외 촬영 시 자연광과 분산광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점, 톤의 단계적 변화, 조명, 카메라 움직임 등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신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장면 등 당시 기술로 구현한 특수 효과가 인상적이라고 언급했다. 영화 평론가 사티쉬 바하두르는 영화의 제목 카드는 영어와 힌디어로 되어 있지만, 내용 면에서는 마하라슈트라적인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특히 영화 속 건축 양식이나 의상이 북인도보다는 데칸 고원의 페슈와 스타일에 가깝다고 분석했다.[5] 아쉬쉬 라자드야크샤는 영화가 그림, 연극 등 인도의 전통 예술 형식을 차용하여 관객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고 평가했다.[24] 한편, 인도 국립 영화 보관소의 딜립 라지푸트는 과거 영사기의 속도(초당 16~18 프레임)와 현재 표준 영사 속도(초당 24 프레임)의 차이로 인해 현재 상영 시 장면 전환이 더 빠르게 느껴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17]
이 영화의 제작 과정은 2009년 파레쉬 모카쉬 감독의 마라티 영화 ''하리쉬찬드라치 팩토리'' (''하리쉬찬드라의 공장'')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이 영화는 제56회 인도 국립 영화상에서 마라티 최고의 장편 영화상을 수상했으며,[25] 제82회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인도 공식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26][27][28]
5. 논란: 인도 최초의 장편 영화 논쟁
"라자 하리샨드라"가 최초의 장편 인도 극영화로 인정받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어 왔다. 일부 영화 역사가들은 다다사헤브 토르네의 무성 영화 "쉬리 푼달릭"을 최초의 인도 영화로 간주한다.[38][39][85][86] 토르네의 영화는 "라자 하리샨드라"보다 거의 1년 전인 1912년 5월 18일에 개봉되었다.[40][87]
그러나 "라자 하리샨드라"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쉬리 푼달릭"은 단일 고정 카메라를 사용하여 마라티어 연극을 촬영한 영화 기록이며, 필름 재료는 런던에서 처리되었고 영국인 촬영 기사가 촬영했다는 점을 지적한다.[41][42][43][44][88][89][90][91] 이러한 이유로 많은 영화사학자들은 "라자 하리샨드라"를 인도 최초의 장편 영화로 간주하고 있다. 인도 정부 역시 "라자 하리샨드라"를 최초의 인도 극영화로 공식 인정한다.[45][92] 1969년에는 팔케의 인도 영화에 대한 기여를 기념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인도 영화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다다사헤브 팔케 상이 제정되었다.[46][47][93][94]
6. 보존
영화의 원래 길이는 약 1127.76m로, 약 4개의 릴 분량이었다. 1917년, 영화의 마지막 남은 프린트는 소달구지로 상영관으로 운반되던 중 마찰과 고온에 장시간 노출되어 화재로 소실되었다.[29][30][76][77] 이에 팔케는 영화를 다시 촬영했고, 이것이 현재 전해지는 버전으로 여겨진다.[29][30][76][77]
그러나 원본 필름 중 첫 번째와 마지막 릴만이 인도 국립 영화 보관소(NFAI)에 보존되어 있어, 이 영화는 부분적으로 유실된 영화로 분류된다.[31][32][78][79] 일부 영화 역사가들은 NFAI에 보관된 이 릴들이 원본이 아닌, 1917년에 제작된 리메이크 영화 ''사티아바디 라자 하리샨드라''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31][32][78][79] NFAI가 필름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화면 왼쪽 약 20%가 손실되었다.[33][80]
또한, 2002년 1월 8일 인도 영화 텔레비전 연구소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보관 중이던 필름이 1,700여 점의 다른 질산염 필름과 함께 소실된 것으로 한때 여겨졌다.[34][81] 하지만 이후 팔케의 자녀들이 보관하던 개인 소장품에서 필름이 발견되었다.[35][36][82][83] NFAI는 이 필름을 복원하고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37][84]
7. 유산
영화 역사가 피로즈 랑군왈라는 이 영화가 "넓은 인상을 주었고 다양한 장소의 많은 관객에게 어필했다"고 평가하며, 흥행 성공은 "수용의 도장을 찍었고 인도 영화 산업의 기반을 다졌다"고 언급했다. 감독이자 촬영 감독인 고빈드 니할라니는 영화의 촬영 기법, 특히 조명과 카메라 움직임을 높이 평가했다. 영화 평론가 사티쉬 바하두르는 영화의 제목 카드는 영어와 힌디어로 되어 있지만, 영화 속에 "분명한 마하라슈트라적인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영화 속 건축과 의상이 북인도보다는 데칸 고원 페슈와 스타일과 유사하다고 언급했다.[5] 아쉬쉬 라자드야크샤는 영화의 서사 스타일이 그림, 연극, 전통 예술에서 차용되어 관객을 영화로 끌어들였다고 분석했다.[24] 인도 국립 영화 보관소의 딜립 라지푸트는 영화 장면이 당시 프로젝터(초당 16~18프레임)보다 빠른 현재 프로젝터(초당 24프레임) 속도로 인해 더 빠르게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했다.
2009년에는 파레쉬 모카쉬 감독이 라자 하리샨드라의 제작 과정을 다룬 마라티 영화 ''하리쉬찬드라치 팩토리''(''하리쉬찬드라의 공장'')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제56회 인도 국립 영화상에서 마라티 최고의 장편 영화상을 수상했으며,[25] 제82회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인도 공식 출품작으로 선정되었으나 최종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다.[26][27][28]
라자 하리샨드라가 최초의 장편 인도 극영화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일부 영화 역사가들은 1912년 5월 18일에 개봉한 다다사헤브 토르네의 무성 영화 ''쉬리 푼달릭''을 최초의 인도 영화로 간주하기도 한다.[38][39][40] 그러나 ''쉬리 푼달릭''은 연극을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한 기록 영화에 가깝고, 영국인 촬영 기사가 촬영하여 런던에서 필름을 처리했다는 점에서,[41][42][43][44] 많은 역사가들과 인도 정부는 라자 하리샨드라를 최초의 인도 장편 극영화로 인정하고 있다.[45] 1969년 인도 정부는 팔케의 인도 영화에 대한 기여를 기리기 위해, 인도 영화계 최고 권위의 상인 다다사헤브 팔케 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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